GKL 에세이 (꽃바람 여행)
봄에 피는 꽃을 보고 그 꽃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도시인이 얼마나 될까. 사실 꽃들의 이름을 구분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꽃에서 매화꽃, 벚꽃, 배꽃으로 꽃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보인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았던, 단지 봄의 배경으로만 쓰였던 꽃이 매력적인 관찰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더 신기한 것은 그러함과 동시에 꽃을 들여다보며 나의 감성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지는 장점도 더해진다고 할까.
나는 그동안 봄이 되면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로 인해 이유 없이 마음이 들뜨고 봄 분위기에 취해 왔었지만 정작 각각 꽃들의 이름을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봄에 나무에서 피는 연분홍색 또는 하얀 꽃은 나에겐 그냥 봄꽃일 뿐이었다. 하지만 꽃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다녀온 1박2일의 순천여행, 우리끼리 이름 지은 ‘꽃바람 여행’으로 나는 달라졌다. 물론 그 친구처럼 식물도감을 살피며 꽃의 학명, 특징을 공부할 정도의 학구열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냥 꽃이었던 그 존재들이 정말 꽃이 되는 그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의 계기는 꽃구경이었다. 그래서 이번 순천여행의 기록을 오로지 인상 깊은 꽃의 일정으로만 남겨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으로 송광사와 순천만도 들렀다. 우리의 주제인 꽃따라 가는 여행으로 그 기록을 남겨보니 크게 세 가지 꽃으로 기록이 된다.
선암사는 순천의 유명사찰이다. 크고 웅장한 절은 아니지만 다리 위를 지나면 신선이 된다는 속설을 지닌 절 입구에 있는 승선교와 옛날 해우소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놓은 선암사 뒷간은 이색적인 볼거리이다.
그리고 봄에만 볼 수 있는 선암사의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선암사의 매화, 선암매이다.
선암사의 매화는 호남5매 중 하나다. 호남5매를 찾아보니 선암사 무우전돌담길 선암매, 백양사 고불매, 전남대 대명매, 담양 지실마을 계당매, 소륵도중앙공원 수양매라고 한다. 사실 나는 봄에 연분홍색이나 흰색의 꽃들을 보면 단순히 벚꽃으로만 치부했던 터라 매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꽃전문가인 친구는 여행을 떠나오기 전부터 선암사의 매화를 사진에 담고 싶다했고 이 친구와 함께 다니다보니 이전보다 꽃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 나에겐 단지 빨강, 분홍, 노랑의 아름답고 고운 빛깔의 배경이었던 꽃들. 그러나 꽃 이름을 알고 관심을 갖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을 보는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자세히 관찰을 해보니 꽃마다의 특색이 있는데 같은 듯 보여도 너무 다른 점들이 있었다.
특히 매화는 여느 꽃들과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일단 은은한 향기이다. 꽃이 향기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매화와 착각이 쉬운 벚꽃은 향기가 없다. 그리고 이 꽃은 나뭇가지에 꽃송이가 듬성듬성 달려 있는 느낌이다. 벚꽃은 각각의 꽃들이 모여서 피는 반면에 매화는 각각의 꽃송이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가지에 붙어서 난다. 그 모습이 왠지 절개 있어 보인다. 바람이 불어 벚꽃이 흩날리는 것과 달리 가지에 붙어서 피어 있는 매화는 가지가 흔들릴지언정 꽃송이가 흩날리지는 않는다. 내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꽃송이지만 참 품격 있다.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매화의 꽃말이 기품, 품격이라고 한다.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꽁꽁 언 땅에서도 고운 꽃을 피워낸다는데 내가 매화에서 느낀 느낌과 꽃의 특징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이런 이유로 매화가 옛 선비들의 글과 그림에 등장하는 특별한 소재가 될 수 있었나 싶다. 우리가 선암사를 방문하기 직전에 내린 비로 인해 매화꽃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선암매의 절정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준 꽃송이에 감사해하며 욕심껏 매화를 카메라에 잔뜩 담았다.
순천역에서 순천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걷다보면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이 보인다. 마치 서울의 한강과 같은, 그 도시의 대표 물줄기인 동천이다. 첫날 버스를 타고 선암사를 가는 길에 동천을 보았는데 물가 양쪽으로 아름드리 벚꽃이 강줄기를 따라 끝없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 벚꽃길이 이어진 것인지 그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봄철에 찾아오는 황사를 때마침 비가 잠재워줬던 터라 청명하고 맑은 날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시야 끝까지 펼쳐진 벚꽃길은 마치 무릉도원으로 향하는 길 같았다. 그래서 숙소를 나오자마자 우리가 향한 곳이 동천변이다. 순천의 첫인상이었던 벚꽃길을 걸어보고 싶어 아침 일찍 동천으로 나섰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동천변은 서울의 벚꽃 핀 한강변과는 다른 색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한강보다 규모는 소박했지만 그 소박한 공간을 알차게 채운 벚꽃나무들. 고요하고 잠잠한 강물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는 물가의 수양버들. 소소하지만 차분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동화속의 한 장면 같이 환상적이었다. 날씨가 맑았다면 더욱 밝고 경쾌한 색감이었겠지만 흐린 날의 꽃길 강변 또한 한톤 다운된 파스텔 톤 수채화처럼 운치 있었다.
우리가 동천을 거닐었던 시간이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많은 사람들과 온갖 소음으로 복잡한 어떤 명소에서의 벚꽃 길과 다른 여유로움에 그 길을 거닐면서 보낸 시간이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전날 매화에 푹 빠져 있었는데 한가로움 속에서 벚꽃천국을 맞이하니 간사하게도 이번엔 이것보다 아름다운 꽃이 없는 느낌이었다. 고즈넉한 풍광에 푹 빠져 한참을 사색에 잠겼다.
벚꽃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 비를 맞으면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미안해질 정도로 기분이 황홀하다. 전날 오후부터 세차게 내린 비로 인해 동천강변의 벚꽃잎들은 우수수 떨어져 있었는데 떨어진 꽃잎까지도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길이었다.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 놓은 꽃무늬 카페트에 정신이 팔린 채 한없이 강변을 거닐었다. 강변이 끝날 무렵 기찻길을 건너고 나니 죽도봉 공원이 나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발길 닿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나타난 공원의 나지막한 동산 위에 정자가 보였다. 크게 높아 보이지 않아 정자에 올라 동천강변과 순천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기로 하고 죽도봉 공원 정산인 강남정을 향해 산길을 올랐다.
순천으로 떠나기 전 찾아본 순천의 명소는 1박2일이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우리의 발걸음을 이끈 죽도봉공원은 명소로 꼽기에 우선순위에 드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번여행 콘셉트가 꽃바람 여행인지라 자연, 자연스러움을 따르기로 했고 특별한 생각 없이 자연스레 마음과 발길이 이끄는 강남정을 올랐다. 우리가 정상까지 오르는데 선택한 길은 ‘청춘데크길’이라는 이정표가 붙어 있는 길이었다. 사실 즉흥적인 일정이었기에 강남정까지 오르는 길이 여러 개인지도 모른 채 선택을 한 것이었는데 ‘청춘’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가 있었다. 청춘이라는 명칭답게 열정과 도전을 요하는 길이었던 듯하다. 단순히 동네 뒷동산이라고 생각하고 오르기엔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으니까.
오르는 도중에 운동부족 도시인인 우리는 다시 돌아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숨이 차게 길을 오르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도와준 꽃이 있었으니 바로 새빨간 동백이었다. 비가 온 뒤라 동백꽃들도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 아쉽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새빨간 동백꽃으로 수놓은 가파른 흙길은 우리가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돕는 기폭제가 되었다. 어른 주먹만 한 꽃송이들이 툭툭 떨어져 있는데 너무 예뻐서 밟기가 아까웠다. 그러한 꽃송이들로 장식된 길을 걸으니 근사한 파티에 입장하는 레드카펫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청춘들이 오른 길임을 증명하듯 어떤 청춘인가가 흩어진 동백꽃송이를 모아 하트모양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또한 그 어느 보석보다 예뻤다. 동백으로 만들어진 새빨간 하트모양을 보니 없던 사랑도 새록새록 솟아날 듯이 사랑스러웠다. 동백에 힘을 얻어 어느덧 정상에 올랐다. 강남정에 꼭대기에 자리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우리가 방금 걸었던 벚꽃 가득한 동천강변과 순천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흐린 날씨가 조금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햇볕 쨍한 날에는 느끼지 못하는 색다른 풍경을 보았다는 것을 위안삼고 동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동백꽃으로 만들어진 동백터널을 지나오는데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동백의 꽃말은 고결한 기다림이라고 한다. 동백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요약해보자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꽃이 되어 핀 것이라고 하지만 왠지 이날 만난 동백은 우리가 강남정까지 오르는데 기다려준 기다림의 꽃이 아니었을까.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순천이라는 지역을 구석구석 살피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낙안읍성, 드라마세트장등 더 유명하고 볼거리 많은 명소들을 뒤로하고 우리의 여행 콘셉트대로 선택하여 송광사, 선암사, 동천강변, 죽도봉 공원, 순천만 갈대밭을 다녀왔다. 물론 일정 중간 중간 지역 인심이 물씬 느껴지는 시장도 들러서 둘러보았지만 못보고 온 것들이 더 많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우리의 콘셉트대로 선택하여 다닌 일정이었기에 보지 못하고 온 것에의 아쉬움을 크게 갖지 않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은 특별한 것을 했기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자연이 주는 감흥을 온몸으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롯이 담고 나면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는 것 아닐까. 도시에서 바쁜 일상과 복잡한 도로 자동차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여유가 없다. 길을 지나다가 화단에 피어있는 꽃을 3초만 응시해 보고 꽃 이름을 한번 불러보는 여유, 그냥 스쳐지나가 버리는 무심함보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꽃향기에 몇 초간 집중해 보는 잠깐으로도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의미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 여행에서 꽃 이름을 알고 관심을 갖고 눈으로 보며 깨달은 것은 매 순간을 대하는 나의 자세에서 내 삶의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말로 표현하려니 한없이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무심히 스쳐지나가지 말고 이름한번 불러주자! 그 관심에서 아름다움은 더 커질 것이다. 비단 꽃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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