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여행전문기자(동아일보사 부국장급)
하쿠바무라의 하포오네 스키장 슬로프에서 다운힐 모습. 아래로 보이는 마을까지 곧장 떨어지는 산악의 주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특별한 곳이다.
스키마니아인 내게 동계올림픽은 가장 기다려지는 이벤트다. 왜냐면 좀처럼 보기 힘든 스키레이싱을 집에서 고화질 TV로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서다. 그런데 이번 소치올림픽에선 그 기대가 완전 망그러졌다. 8일간의 아이슬란드 취재출장이 겹쳐서다. 하필이면 다운힐 경기가 열리던 그 기간이라니….
출발 전날 TV에 비친 소치의 다운힐 경기장은 간담을 서늘케 하는 악마의 코스였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올림픽 다운힐 코스는 늘 설계자와 선수 간에 말없는 전쟁터다. 설계자는 선수가 쉽사리 넘볼 수 없게 곳곳에 지뢰(위험요소)를 설치한다. 반대로 선수는 연습주행 중에 그걸 간파해 자신의 스킹 스타일에 맞는 최적의 폴라인(Fall line·산 위에서 굴린 공의 궤적)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게 쉬운가. 한두 번 타보고 기권하는 선수가 예외 없이 나오는 게 그걸 증명한다. 경기포기 이유는 단 하나. 넘어졌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엄연한 공포다.
KBS가 다운힐 경기를 소개하는 짧은 영상엔 은퇴한 스키선수 헤르만 마이어(오스트리아)가 등장했다. 다운힐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레이싱인지를 보여주기에 이 선수에 관한 기록영상만큼 리얼한 것이 없는 만큼 그 선택은 적절했다. 1998년 일본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그의 다운힐 경기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소는 하쿠바무라의 하포오네 스키장.
월드컵 우승으로 스키황제에 등극한 마이어는 힘찬 스타트와 저돌적인 레이싱으로 급경사의 상단슬로프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첫 번째 회전에 이어 두 번째 회전. 그런데 그게 끝나기 전 그의 몸이 회전 호 바깥방향으로 퉁겨져 날아갔다. 그의 몸은 2중의 안전그물을 차례로 뚫고 세 번째 그물에 가까스로 걸렸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헤르만 마이어의 옛 홈페이지 표지. 나가노 올림픽 다운힐레이스 중 넘어지는 장면을 캡처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난 마이어의 모습이다. 이 믿기지 않는 장면. 2001년 이 하포오네 스키장 취재 직후 마이어의 홈페이지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 사고로 그는 실격당해 금메달을 놓쳤다. 하지만 황제는 역시 황제였다. 이틀 후 시가고겐의 히가시다테야마 스키장에서 열린 대회전과 이어 하포오네에서 열린 슈퍼대회전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거푸 거머쥔 것이다.
그 위용에 전 세계가 놀랐다. 기막힌 별명도 따랐다. ‘헤르미네이터’(Herrminator)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불굴의 사이보그를 패러디 해 이름(헤르만)과 조합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몇 년 후 이 별명이 과장이 아님을 또 한 번 실증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포르셰에 받혀 두 다리와 한 팔이 으스러지는 대형사고를 당하고도 3년 만에 월드컵에 복귀한 것이다. 이렇듯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스키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멋진 대회였다. 그중엔 ‘달리는 폭탄’(La Bomba) 알베르토 톰바(이탈리아 스키선수)가 퇴장하고 그 자리를 헤르미네이터 헤르만 마이어가 차지하는 세대교체도 포함해….
하쿠바무라의 11개 스키장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하쿠바고류 스키장. 아래로 기타알프스 산악 한가운데 들어선 해발 500m의 하쿠바무라 마을이 보인다.
1998년 2월20일 시가고겐의 야케비타이야마 스키장(회전경기)에는 일왕부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선수 기무라 기미노부 선수도 응원할 겸 4연속 올림픽 메달레이스(88년 금·92년 94년 은메달)에 도전한 노장 톰바의 스킹도 관전할 겸해서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1차전 17위라는 저조한 기록에 골반통증으로 2회전을 포기한 것이다. 톰바는 그날 올림픽에 처녀 출전한 한스 테터스 부라(당시 22세·노르웨이)의 금메달 레이스를 호텔 객실에서 TV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날 뉴욕타임스는 이런 제목으로 황제의 은퇴를 기정사실화 했다. ‘나이는 못 속여. 부상치레 끝에 새끼 양처럼 사라지다.’
하쿠바무라의 11개 스키장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하쿠바고류 스키장. 아래로 기타알프스 산악 한가운데 들어선 해발 500m의 하쿠바무라 마을이 보인다.
나가노 현은 ‘일본의 심장’이다. 혼슈(일본열도를 구성한 네 개의 큰 섬 가운데 중심 섬)의 정중앙에서 위치해서다. 이곳은 해발 3000m급 험준한 산악이 겹겹이 들어찬 ‘재팬 알프스’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기타(북)알프스’라는 산악지방. 1990년대 이곳 스키장은 109개나 됐다. 당시 1700여개이던 스키천국 일본의 전국 현 중 가장 많았다. 일본의 두 번째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일본스키의 발상지’ 니가타 현을 제치고 나가노 현이 선정된 배경의 핵심이다.
이런 나가노 현에서도 노자와 온천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인 스키마을이다. 매년 2월 전일본스키연맹이 주최하는 기술선수권대회가 전통적으로 여기서 열리고 한국의 스키어들도 1960년대부터 자주 이 대회를 참관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8년 나가노가 올림픽을 주최한 이후로는 바뀌었다. 올림픽 스키경기가 열린 하쿠바무라(白馬村)와 시가고겐(志賀高原)이 나가노를 대표하는 스키마을로 등극한 것이다. 나가노올림픽이 남긴 빛나는 유산은 물론 올림픽에 대비해 가설한 나가노신칸센 철도에 힘입은 덕분인데 하쿠바무라에는 11개, 시가고겐엔 21개의 스키장이 있다.
하쿠바무라의 최남단에 있는 쓰가이케고겐 스키장. 거대한 설원의 베이스가 인상적이다.
내가 하쿠바무라를 처음 찾은 건 2001년 1월. 아시아나항공이 오가는 도야마 공항을 통해서다. 도야마 현은 기타알프스 연봉을 경계로 나가노 현 반대편(북쪽)의 동해안에 있다. 그 도야마공항에서 하쿠바무라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 거리. 기타알프스 산중의 하쿠바무라는 해발 2000m이상 험준한 산악에 갇힌 해발고도 500m의 분지로 1998년 나가노올림픽의 개막식이 열린 곳. 점프는 물론 활강, 수퍼대회전 경기가 여기서 열렸다.
하쿠바무라의 최남단에 있는 쓰가이케고겐 스키장. 거대한 설원의 베이스가 인상적이다.
하쿠바무라는 초입부터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정표가 모두 스키장 간판이어서다. 나가노가 한국의 평창이라면 하쿠바무라는 횡계다. 한겨울이면 마을 전체가 설원으로 변하기 때문인데 마을을 벽처럼 둘러싼 산악에 쓰가이케고겐, 이와다케, 하포오네, 하쿠바고류, 하쿠바47(포티세븐) 등 스키장이 줄줄이 들어서있다. 그 스키장을 한 줄 직선도로(6km)가 이어준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더라도 버스를 타고 매일 다른 곳으로 이동해 스키를 즐긴다.
그중 최고는 역시 하포오네. 최정상(1871m)엔 올림픽 활강경기 출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베이스까지 고도차는 1071m. 천천히 다운힐하며 내려오다 보니 슬로프가 아주 특별해 보였다. 주봉에서 마을로 곧장 뻗어 내린 주능선을 따르고 있어서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문데 특징이라면 경사가 일정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사가 용평리조트의 레드수준이어서 스킹을 제대로 즐기려면 최소 중상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일본인 스키어는 거개가 상급자였는데 모두가 정교한 카빙 쇼트턴과 롱턴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시가고겐의 데라고야 스키장. 북사면 남사면 양편에 슬로프가 있고 그 사이 계곡에 마을이 있다.
가족과 함께라면 하쿠바고류나 하쿠바47, 쓰가이케고겐을 권한다. 특히 쓰가이케고겐은 그 베이스가 축구장 몇 개 크기의 넓고 완만한 눈밭이라 부담없이 즐기기에 좋다. 마을도 설원 밑이어서 스키를 타러 오가기에 편안하다. 하포오네 스키장 근방의 다이가쿠간(大岳館)도 기억해두자. 1968년부터 몇 년간 한국스키대표팀을 가르친 최초의 외국인코치 마루야마 쇼지씨(80·전일본스키연맹 고문)가 운영하는 온천료칸이다. 2층 휴게실엔 나가노올림픽 당시 유명선수의 스키와 휘장 등이 전시돼 있다.
한편 시가고겐은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의 고원산악. 거기엔 스키장이 무려 21개나 포진했는데 더 놀라운 건 74개 리프트로 완벽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또 모든 스키장 베이스가 해발1400m이상이란 것도 특징이다. 용평리조트의 발왕산 정상(1459m)에 맞먹는 고도임을 안다면 이곳의 설질이 어느정도 일지는 가늠 될 것이다. 시가고겐에선 이 21개 스키장을 74개 리프트로 이틀간 두루 섭렵하는 라운딩 투어가 색다른 즐길 거리다.
시가고겐의 히가시다테야마 스키장의 슬로프. 고원의 산등성 곳곳에 슬로프가 조성됐다.
나가노올림픽 당시 시가고겐에선 스키의 회전과 대회전 경기가 열렸다. 스노보드 대회도 이 고원 아래에 자리잡은 카바야 스노보드파크에서 열렸는데 이 경기는 동계올림픽사상 최초로 열린 스노보드 경기(남자대회전)였다. 이 고원에서 가장 높은 산은 요코테 산(2305m). 이 산을 향해 가설된 고원도로는 마루이케(연못)에서 야케비타이 산으로 가지를 친다. 마루이케는 1947년 당시 패전국 일본을 군정으로 통치하던 미군이 겨울휴양소로 쓰기 위해 T바를 가설했던 곳으로 이게 일본최초의 리프트로 기록됐다.
시가고겐의 히가시다테야마 스키장의 슬로프. 고원의 산등성 곳곳에 슬로프가 조성됐다.
시가고겐에 갔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슬로프가 하나있다. 히가시다테 산 아래에 올림픽 대회전 코스로 사용된 슬로프다. 멋진 카빙롱턴으로 우아하게 장거리 크루징을 즐길 수 있다. 파우더스킹을 원한다면 온천마을 구마노유가 제격이다. 시가고겐의 스키장엔 베이스마다 산중마을이 있다. 그래서 점심식사는 물론 숙박도 한다. 그러니 시가고겐에선 고즈넉이 산장에 머물며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내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스키장으로 시가고겐을 손꼽는 첫 번째 이유다.